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의
새로운 소식과 보도자료를 만나보세요.

'재난 현장 속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 -1- │ [박지용 님] – 봉사, 내 삶이 바뀌는 터닝 포인트

상세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8-29
첨부파일


 

 

 

봉사, 내 삶이 바뀌는 터닝 포인트

 

<‘재난현장 속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 박지용 님

                                                                                                                                   

 

군인의 사명을 통해 깨달은 봉사의 소명

“10대 때는 봉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입대 후 군부대 차원에서 헌혈을 했는데 아, 정말 좋은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신체조직으로 나눌 수 있는 건 헌혈밖에 없거든요. 제가 있던 부대에서 정기적으로 노약시설에 봉사활동을 나갔는데, 그때 감정도 정말 좋았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게 기본이잖아요. 그럴 때 군인의 존재 이유가 있는 거고, 그래서 국민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거고. 거기에 대민 봉사도 할 수 있다니. 군인으로서의 삶의 가치가 너무나 중요해 보였어요.”

삶이 흔들리던 때 나를 바꿔보고 싶어 간 군대였는데 박지용 씨는 그곳에서 군인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 눈떴다. 군인이 되는 건 소명이자 천직 같았다. 열아홉 살, 생년월일을 넘기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직업군인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인생은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IMF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군복무를 희망하였으나 당시 장기심사제도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부사관급 군인들은 전역할 수밖에 없었다. 대상자가 10명이라면 1명만 장기근무자로 선정하고 나머지 희망자들은 군생활을 전역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설명한 박 씨.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전역했다고 밝힌 그는 군생활에 미련이 남아 “1년을 더 연장했다”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끝내 군복을 벗게 된 그. 25살의 일이었다.

막막했던 정신을 부여잡고 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중 무술 수련을 위해 다닌 유도 체육관에서 그는 우연히 퍽치기를 당한 시민을 구조했다. 다시 한번 누군가를 돕는 일의 보람으로 그의 가슴이 요동쳤다. “한겨울이었는데, 체육관을 정리하고 밖에 나가보니 한 분이 피투성이가 돼 거리에 쓰러져 있는 거예요. 그분을 수습한 뒤 상가 과일가게 아주머니한테 도움을 청해 경찰을 부르려는데, 그분이 정신을 차리고서는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갑자기 사위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장에서 술을 좀 많이 마시고 귀가하던 길에 퍽치기를 당한 거였어요.”

2007년 재입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고민 없이 자원했고, “정말 열심히, 후회 없이 살자”는 목표를 세웠다. “군 생활하면서 항상 세 가지를 생각했어요. 첫째, 군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성과를 내자. 둘째, 봉사하자. 주어진 봉사 이외에 내가 스스로 찾아다니면서 하자. 셋째, 기부하자. 국민의 세금으로 받은 월급을 더 값지게 사용해야 한다.”

이후 그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대학에 입학해 경찰경호행정학과를 졸업했고, 몇 년 후에는 다시 소방방재학을 전공했다. 틈틈이 정보기기기능사, 지게차기능 자격증, 노인운동지도사 자격증, 심리상담사 자격증 등을 취득했고, 사회복지사 과정 등을 수료하기도 했다. 또한 부대에서 관련 업무를 남들보다 2, 3배 치열하게 수행한 끝에 08년도 사단급 우수부대 표창에 이어 14년, 19년 사단급 최우수부대 표창, 20년 사령부 최우수부대 표창과 최우수 유공자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 외 민관군 유공자로 선정되어 소방방재청장 표창 2회, 자살 예방(경연대회 전국 1위), 헌혈, 사이버범죄예방(예방활동 전국 연속 2위), 금융유공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 표창, 보건복지부 표창, 경찰청장 감사장, 게임물관리위원장 감사장 등을 받기도 했다. “제 삶의 역사이자 증거”라며 그가 내민 5cm 두께의 스크랩북은 그가 받은 표창과 수료증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여기서 다시 살아도 될 것 같아요”

박 씨는 지금껏 양로원과 보육원 집수리 봉사, 도배 봉사를 꾸준히 다녔고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서는 기부를 계속해오고 있다. 특히 그는 재난 현장 봉사 또한 한 해도 거르지 않았는데, 궂은 수해현장이 그의 주된 방문 장소다.

2017년 여름, 충청권 일대에 폭우가 쏟아졌다. 최대 피해를 입은 곳은 충청북도 청주시. 하룻밤 새 250밀리미터가 넘는 폭우가 내리면서 주택과 농경지, 도로 곳곳이 침수됐고 충북선 열차운행은 중단되기도 했다. 당시 직업군인으로 포항에서 근무하던 그는 연차를 내고 한걸음에 청주를 찾았다. 그가 투입된 곳은 3층 펜션 건물로 2층까지 물이 범람한 상태였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건물 내 진흙과 밀려온 나무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펜션이 제 모습을 드러냈지만, 인테리어 됐던 나무들이 다 썩은 상태였다. 나무를 뜯어내는 일이 끝없이 반복됐다. 봉사를 마치고 근무지로 복귀하던 날, 펜션 주인의 남동생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올해는 어렵겠지만 내년에는 꼭 가족들하고 나들이 겸 이곳에 들려주세요.”

5년 후인 2022년 8월 9일, 서울에 내린 폭우로 인해 관악구 반지하 주택에 살던 발달장애 가족이 침수로 고립돼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역을 앞두고 전직 사회적응 기간에 있던 그는 뉴스로 소식을 접하고는 관악구청과 관악구자원봉사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곧장 서울로 향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차 안에 제습을 위한 장비가 가득 실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수많은 수해현장을 다니며 제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몇 년간 수백만 원의 사비를 털어 제습 기기를 사들였던 터. 그래서 현재까지도 그의 차 안엔 산업용 제습기 2대와 가정용 제습기 3대를 비롯해 선풍기와 공기살균기, 원통형 건조기가 트렁크는 물론이고 운전석을 제외한 전 좌석에 꽉 들어차 있다.

“침수 복구의 가장 중요한 단계가 수분 제거예요. 침수된 건물은 콘크리트가 물을 머금은 상태라 수분이 충분하게 제거되지 않을 경우, 곰팡이가 번식할 수밖에 없어요. 꿉꿉한 냄새도 오래 지속되고요. 사람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되는 거예요”

그는 관악구 수해복구 현장에서 팀의 리더를 맡아 물에 젖은 물건을 정리하고 운반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정화조 오물이 역류하고 음식물이 썩어 냄새가 진동하는 건물 내부의 물기를 제거하기 위해 포항에서부터 챙겨온 제습기와 건조기를 쉴새 없이 사용했다.

산업용 제습기 1대가 지하 50평 규모의 상점에 가동되자, 1일 동안 7~80L에 달하는 상당한 양의 물을 뽑아냈다. 그러자 도움을 청하는 손길이 많아졌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건 혈액암으로 투병 중인 독거노인을 도왔던 일이라는 그. 동장 손에 이끌려 간 곳엔 반지하에 거주하던 중 물난리 피해를 본 할머니 한 분이 망연자실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는 내부 정리를 마친 후 제습기를 설치했고, 제습기는 이전과 동일하게 단시간 내에 엄청난 양의 물을 흡수해 토해냈다.

“할머니께서 고맙다며 엄청 좋아하시더라고요. 다음날 오전에 갔더니 꿉꿉한 것도 사라지고 냄새도 빠져서 여기서 다시 머물 수 있을 거 같다고 하시는데, 삶의 희망을 드린 것 같아 제 스스로가 뿌듯했어요”

애초 이틀을 예정하고 갔는데 안타까운 사연들에 연장을 하고 또 하다 보니 8월 한 달간 포항과 서울, 왕복 10시간 거리를 몇 차례나 운전하여 오가게 되었다는 박 씨. 단체가 아닌 개인 차원에서 봉사를 수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식사와 숙박, 유류비와 통행료까지 정부 지원이 전무했고, 그러다 보니 자원봉사에 들인 비용만 사백만 원이 넘는다고 밝힌 그는 되려 그 현장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안타깝지만 정말 놀라운 현장이었어요. 관악구자원봉사센터의 센터장님이랑 담당자 선생님들이 모두 열정적으로 복구 업무에 참여하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지역주민들 모습도 감동적이었고요. 저를 마을 주민들에게 인도한 동장님은 이웃 중 도움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러한 이가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지 다 꿰고 계시더라고요.

여러모로 복구 과정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그 힘든 상황을 빠른 시일 내 바꾸어 놓는데, 그게 신기한 거예요. 이 변화의 과정에 나도 한몫하고 있구나 싶으니 봉사하는 내내 너무 뿌듯하더라고요.”

올해 수해봉사는 이것으로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2022년 9월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그의 삶과 일터인 포항 남구 일대가 물바다가 되며 또 한 번 현장에 참여하게 됐다. 포항제철소의 생산라인마저 완전히 침수된 재난 상황에 그는 다시 구슬땀을 흘렸다.

“80대 어르신이 포도 한 박스를 주시는 거예요. 자기가 포도농사 짓는 사람이라 이거밖에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정말 고맙다고. 어찌 보면 별거 아닌데 저는 그런 일들이 진한 감정으로 남아있어요. 이게 돈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잖아요. 돈은 받을 때만 좋고 감정으로는 잘 남지 않는데.. 이 벅참을 꼭 많은 분들이 현장에서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 

자원봉사 제도와 처우 개선은 재난 예방과 피해 복구의 지름길

그에게 재난 복구 현장의 개선에 대해 물었다. 이내 그는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며 다져온 생각들을 들려주었다.

“자율방범대와 의용소방대를 잘 활용하면 좋겠어요. 도시의 경우 배수로가 잘 되어 있지만, 빗물받이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물난리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담배꽁초와 낙엽 등 쓰레기가 쌓이면 악취가 나는 것은 물론, 비가 올 때 배수로가 막혀 역류하게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마을마다 조직돼 있는 자율방범대와 의용소방대가 장마철 정기 순찰을 통해 이곳들을 꼭 확인하도록 정책화한다면 물난리를 방지할 수 있을 거예요.”

현재는 일회성 캠페인 활동에 그치는 빗물받이 관리를 동네순찰 등과 같은 주요 업무로 지정하여 이에 공로가 큰 개인이나 단체를 지자체 차원에서 응원하고 포상한다면 효과가 극대화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한 그는 국가재난이 선포될 시, 그에 따른 봉사를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봉사자를 양성하는 게 중요할 거라고도 밝혔다.

이와는 별개로 자원봉사자에 대한 처우 역시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 박 씨. 국가긴급재난 시 전국의 자원봉사자들이 피해지역에 몸과 마음을 보태기 위해 달려간다는 점을 예시로 들었다. 센터나 기관에 소속된 사람이 대부분이긴 하다만, 그처럼 나 홀로 봉사에 나서는 이들 역시 분명 있을 터. 소속이 있는 봉사자의 경우 도시락 등의 편의를 제공받지만, 그렇지 않은 봉사자의 경우 식사는 물론 숙박, 교통비 등을 온전히 개인이 해결해야만 한다는 점이 아쉽다고 그는 언급했다. 재난 현장에서 자발적인 개인 봉사자의 참여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원봉사 활동이 확인되거나 인증된 사람들의 경우 식비나 숙박비, 주류비를 일부 보조해주거나 할인해주는 정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정 식당, 지정 숙소 등을 활용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겠고요. 장기간 자원봉사 하는 이들에게 금전적 비용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데, 조금이라도 보조가 된다면 자원봉사에 나서는 개인 봉사자들의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긴급한 재난 복구 현장에서 자원봉사자들을 대하는 이재민들의 태도는 좀 더 성숙 될 필요가 있다고 소신을 밝힌 그는 “복구 현장에서 주민들이 계속 잡아요. 도와달라는 거죠. 급하고 절박한 마음은 알겠는데, 그렇게 한 분씩 자원봉사자를 각자 데리고 가버리면 일을 체계적으로 할 수가 없으니 문제가 생겨요. 인력이 빠지면 제때 그 일에 집중을 못 할뿐더러 주민들 내부와 봉사자들 사이의 갈등만 생기는 거죠. 자원봉사센터에서도 이 부분을 잘 조율하고 점검해주면 좋겠어요.” 

봉사, 남을 통해 나를 바꾸는 시간

그는 생각만으로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단 본인 스스로가 무언가를 자처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자원봉사란 무엇인지 물었다.

“사람들이 자원봉사라고 하면 흔히 누군가가 바뀔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것도 맞지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자원봉사자 스스로가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봉사란 남에게만 주는 게 아닌 본인 스스로를 바꾸는 삶의 터닝 포인트이자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도 생각해요.”

올 초 그는 21년간에 걸친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마흔두 살의 나이 절반을 군대에서 보냈기에 아쉬움이 크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때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새 발걸음을 걷기에 앞서 갖가지 생각들을 정리할 겸 군복무 혹은 자원봉사로만 다닌 전국 각지를 캠핑카로 유랑중이라고 밝힌 박 씨. 그러나 그러한 여유를 즐기는 순간들 속에서도 그는 분명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언제나처럼 현장으로 바삐 향할 것이다. 군인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그가 우리 사회에 보내준 봉사에 깊은 고마움을 전하며, 그의 새로운 출발을 열렬히 응원한다.

주관 – 4·16재단 협력 –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후원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글 – 유해정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Copyright Ⓒ (재)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2020. All Right Reserved